untitled_Mixed media on silk layered canvas_45.5×53cm_2020
글쓴이: phyl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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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_Mixed media on silk layered canvas_45.5×53cm_2020
Transparent and opaque
Transparent and opaque_116.8×91cm (each)_Mixed media on silk layered canvas_2020
혼종을 통한 생명의 지속에 대한 염원
혼종을 통한 생명의 지속에 대한 염원
김희영 (미술사, 국민대학교)
<겹의 언어>의 제목으로 열리는 정윤영의 이번 전시에서는 선명하고 밝은 색채와 부드러운 생동감을 전해주는 선적인 리듬이 각각의 독특한 강도와 밀도로 조화를 이룬 추상 작업이 소개된다. 꽃잎의 수맥을 연상시키는 섬세한 선묘, 율동적으로 흐르는 듯한 굵직한 선적 요소들, 때로는 세밀한 부분들을 대담하게 덮어버리는 붓 터치, 흐르는 물감 등으로 다양한 형태와 색채가 자유롭게 어우러진 화면은 작가의 부단한 조형 실험을 보여준다. 생기 가득한 역동적이고 추상적인 화면 위에 제시된 절개된 꽃의 단면, 잎의 줄기, 혹은 장기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형태들은 무한한 자유가 부여된 자율적인 화면의 리듬을 간헐적으로 정지시키는 듯하다. 이는 단지 구상성의 개입으로 인해 추상적인 화면 안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조형적인 타협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이러한 조용한 분절과 정지는 작가의 미학적 실험의 근거를 드러내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한 공간 안에 자유롭게 공존하는 화면은 사실상 다층적인 겹으로 구성되어 있다. 캔버스에 그려진 이미지 위에 몇 겹의 반투명한 비단에 그려진 이미지와 형상들이 겹치면서 구현된 화면은 각기 다르면서도 연결된 이미지들이 공존하는 장이다. 여러 겹의 이미지들은 물리적, 시간적 차이를 상정하면서 서로 겹쳐지는 과정 안에서 보완하기도 하고 덮기도 하고, 연결하면서도 맥을 끊기도 하는 가운데 생명의 지속성을 시사한다. 이는 화면 안에 고립된 미학적인 자율성을 구현하려는 노력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상이한 공간과 시간대에서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신체에 물리적, 심리적으로 인각되었음을 여러 겹으로 중첩된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래된 경험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나 소멸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재의 감성과 사고에 영향을 준다.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피할 수 없는 병마의 고통에 직면하여 생명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고독한 시간, 생명에 대한 갈망과 애착, 자연생태계에 편재하는 생명의 지속을 위한 다채롭고 지난한 노력에 대한 성찰 등이 정윤영의 작업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임을 되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신체에 인각된 고통의 기억, 그리고 존재의 연약함을 일상적으로 자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유한함은 작가에게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리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로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모순적인 사고와 감정들이 자아 안에 공존하고, 서로 충돌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타협해 가는 반복되지만 다른 내적인 싸움이 정윤영 작업에 내재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정윤영의 감성적, 성찰적인 서사는 <겹의 언어>에서 보여지는 작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얼핏 보기에 화려한 양란의 꽃잎, 선명한 색채, 봄바람이 부는 듯 생기에 찬 화면의 리듬 등은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것 같다. 오랫동안 불화의 기법으로 작업을 해 온 작가는 철선묘로 명확하게 대상을 그려내는 기량을 갖추고 있다. 역동성 안에 내재된 혼란 속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듯한 세밀한 선들은 그러한 선묘의 확장을 보여준다. 108배로 하루를 시작하는 작가는 반복되는 시간 안에서 자신과 세계와 항상 새롭게 대면한다. 그리고 또 다른 겹의 기억을 만들고 지나간 기억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가운데 내일을 기대하는 끊임없는 수행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
정윤영은 모순과 충돌로 가득한 현실을 살아가지만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과정 안에서 서로 다른 것들을 병치시킨다. 양란의 매혹적인 형태는 인간 장기의 부분을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형태에 중첩되어 창의적인 조형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이질성의 공존을 통해 구현된 조형성은 혼종을 통한 생명의 연장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염원한다. 윤회를 통한 끊임없는 존재의 지속, 죽음 다음에 이어질 다른 차원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가시적으로 갈등적인 요소들이 영속하지 않음을 알고, 없어질 것에 대한 욕망의 허무함을 자각하게 한다. 개인적인 기억의 과정을 보여주는 겹의 화면은 정윤영의 선별적인 선택을 통해 미학적으로 승화된 깨달음의 기쁨을 공유하고자 우리를 초대한다.
[파이낸셜뉴스] 2017. 11. 10.
[스포츠경향] 2017. 8. 2.
[브레인미디어] 2017. 7. 24.
[브릿지경제] 2017.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