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의 두께, 불확실성의 모호한 경계

 

 

홍경한(미술평론가)

 

  1. 작가 정윤영의 작품은 추상적인 간접화법을 통한 존재로서의 자각에 무게를 둔다. 조형의 단초야 삶의 고저를 바탕으로 한 인간 내면에 똬리 튼, 자기만의 심층에 기인하지만 매제의 얇은 망을 뚫고 안착한 빛과 선, 색과 면은 나약한 모든 것을 이겨내는/ 이겨내기 위한 생성원리와 생명원리의 구체적 적시수단이다.

2019년 ‘겹의 언어’ 전에 선보인 작품 <Odontioda George McMahon Fortuna>(2019)에서 여울진 식물이미지(선으로 된 꽃)는 화면에 얹힌 듯 독립적으로 자리하고, 그 사이를 색을 머금은 획이 채우는 형국이다. 희미하게 선으로만 자리한 꽃은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모호한 배경은 그 꽃의 존재를 배척하지 않는다. 만약 꽃이 하나의 대상이라면 배경은 그 대상을 둘러싼 실체적 환경이다.

<Paphiopedilum venustum>(2019)과 <Her painting was opaque to me>(2020) 시리즈 같은 작품 또한 존재성에 관한 작가의 시각을 확인시킨다. 예를 들어 물질에 불과했던 실크 레이어(silk layer)는 <Paphiopedilum venustum>에 이르면서 생명의 명멸을 하나의 공간에 동시 발화시켜 침잠과 격정에 세례(洗禮)하는 양태를 띠며, <Her painting was opaque to me> 연작에서는 어떤 교직으로써 생명의 순환원리를 엿보게 한다.

이처럼 정윤영의 작업은 존재에 관한 화두가 놓여 있다. 과거 작품에서 확인되는 식물 이미지들은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다가도 작금에 이르러선 전반적으론 어딘가 명징한 듯 모순되며 중첩으로 인한 ‘모호한 경계’를 지닌다.

이는 곧 ‘나’를 둘러싼 불확실성을 대리하는 것으로, <Anna Katharina>(2019)를 비롯해 그 이전 작업인 <A uterus is different from a vagina>(2018), <식물 같은 밤>(2017) 등 많은 작업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불확실성의 대리는 정윤영 작업을 관통하는 무브망(mouvement)으로 인해 더욱 가중된다. 작품마다의 레이어를 다층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며 생성과 소멸, 복잡함과 단순함, 격정과 고요를 넘어 불확실성의 모호한 경계를 뚜렷하게 만드는 조형원리이다.)

흥미롭게도 모호함과 불확실성의 조합인 불확실성의 모호한 경계는 되레 존재성을 옹립시키지만 우연성의 가장을 수용함으로써 미학적 영역으로 외연을 넓히는 촉매가 된다. 명료한 형상과 의미의 결정화의 방식보다는 비결정의 화법이 반영된, 2차원적인 실크와 캔버스에 계산 없이 펼쳐지는 안료(물감)의 우연성이 내적 필연성과 겹겹이 맞물려 어떤 뚜렷한 경계도 없이 존재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1. 정윤영의 작업에서 중요한 건 존재를 포용한 실존이라는 명사이다. 존재는 ‘거기 있다는 것’이고, 실존은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존재와 실존은 내적 상황을 투사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 예술에 있어 때로 창작의 발로가 되어 욌다. 정윤영에게 존재와 실존의 간극은 구분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내부에 안착된 가치들은 약간의 차이를 지닌다. 거기, 있다는 게 그만의 ‘내적 풍경’(자연의 모습을 투사한 그런 풍경이 아닌 풍경)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하는 요소인 탓이다.

인간이란 항상 세계내존재이듯, 작가의 작품 역시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과의 거리, 인간으로서의 삶의 궤적과 풍경이 담겨 있다. 나아가 살아 온 궤적과 내면의 풍경은 역으로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이면서 현실적으론 강인한 생명력, 존재양식에 대한 문제와 맞닿는다. 그래서 정윤영에게 예술이란 현존재(Dasein)에 관한 담담한 일기이다. 적어도 그가 작업실 작품 앞에 섰을 땐(거기에 있을 때) 그 어느 곳보다 존재한다는 것을 체감한다. 즉, 예술이란 무대 위에서면 비로소 실존재(Existenz)임을 깨닫는다.

때문에 정윤영의 작품들은 지금의 존재성과 관련이 있다.(이에 대해 김희영은 “윤회를 통한 끊임없는 존재의 지속, 죽음 다음에 이어질 다른 차원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가시적으로 갈등적인 요소들이 영속하지 않음을 알고, 없어질 것에 대한 욕망의 허무함을 자각하게 한다.”고 썼다.)

지금의 존재인 그는 삶에서 건져 올린 상황과 상태를 통해 예술의 싹을 틔우며, 조형은 그것의 드러남과 감춰짐의 틈에서 움튼다. 이는 일종의 잠재적 운율로, 드러남과 감춰짐은 상보적 작용을 거쳐 작품 내에 뿌릴 내리며 궁극적으론 정윤영 작업만의 성격을 형성한다. 그 성격이란 바로 집약된 ‘삶의 결’이다.

작업만 놓고 해석할 때 그의 ‘삶의 결’은 두 가지 등선에 위치한다. 첫 번째는 조형으로, 박수근미술관 레지던스에서의 1년이 그러했듯 이것은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동기요, 표상화 되는 순간 확인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삶의 결’ 그 두 번째는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An opaque body>(2019) 연작에서처럼 정윤영의 작품은 생명의 유한성에서 피어난 여러 감정,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심리적-정신작용의 주관임을 암시한다. 이곳엔 하늘거리는 실크의 동세와 달리 환상이 없다. 대신 현실계에서의 결핍과 충족이 사유의 방식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일련의 상황에서 비롯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본능적 갈망, 자유로의 길이 배어 있다.

실제로 박수근미술관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며 제작한 정윤영의 2020년 근작(전시명 ‘어떤 그늘’)은 몸과 정신으로 느끼고 체감한 것들의 반영임을 일러준다. 살며 살아가며 마주한 기쁨과 슬픔, 좌절과 고통, 비애와 환희 등을 미적 거름망을 통해 걸러낸 결과물로써 스스로 미완의 존재임을 고백한다.

여러 형식의 작업 가운데 눈에 띄는 그의 대형 작품을 가만 보면 결여와 상실이 섞인 불완전함이란 고통스러운 기억과 현실을 배태하지만 존재의식을 배양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양가적이다. 그리고 이 양가성은 근작에서 강조되곤 하는 화면 분할(두 개의 삼각형 등), 족자와 대형 캔버스에 드리운 비가시적인 이미지를 통해 더욱 가중된다.

 

  1. 정윤영의 작품에는 다양한 조형요소들이 부유한다. 그 중에서도 색의 기호성이 눈에 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색은 노랑이 섞인 황색(黃色) 계열이다. 보라와 푸른빛 감도는 색도 종종 애용되지만 지그시 눈을 감고 전체 작품을 보면 황색계열이 주를 이룬다.(감각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정작 잘 모를 수도 있다.)

황색은 세계의 중심이며 창조된 생명성의 원류를 의미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를 담은 대지(大地)의 색이기도 하다. 뜨거운 열정(熱情)과도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그가 황색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로 삶에 대한 의지와도 연관된다. 따라서 황색은 질곡 속의 삶일지라도 어둠이 거세된 묵음(黙音, 고려불화에서도 사용되는 채색기법인 ‘배채법(背彩法)’으로 적용되는 것이기에 특히 그렇다)의 지향과 주어진 환경 내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최선을 다하기 위한 삶에 대한 태도를 읽게 한다.

다소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일부 오브제 작업도 매한가지다. 기획자 안소연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관광객들의 명소가 돼버린 성북동 북정마을 주민들이 참여한, 일종의 커뮤니티 미술”로 바라본 <New for old, Old for new>이다.

이들 오브제는 전시장에 들어섬으로써(주민들이 사용하던 화분을 새로운 화분으로 교체한 후 새로 발굴된 유물처럼 전시장에 들여 놓았다) 조형적으론 의외의, 불현 듯, 예상 가능한 반응의 공간을 형성한다. 때문에 장소 특정적 작품으로 이해해도 이상하진 않다.

그러나 깨진 화병과 화분, 깡통과 스티로폼 등을 이용한 설치 및 사진 작업들은 버려진 사물에서 느껴지는 비련이 배어 있고, 무언가 절망적이면서 어둡다는 점, 그리고 “도시에서 밀려난 변두리의 풍경에 배어있는 일종의 애잔한 향수(nostalgia)”(안소연)를 유발한다는 측면에서 존재성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어떤 사물에 안착하는 순간 그 또한 개인적 함의에 벗어나지 않는 것일뿐더러 여성인 작가의 스토리가 투사된 매체로도 읽힌다.(통상 예술가가 특정 사물에 시선을 둘 경우 그 사물은 본래의 용도와 의미는 배척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이때 그 사물은 예술가와의 내적 동질화를 이루는 게 대부분이다.)

정윤영의 조형요소 가운데 색과 더불어 유독 자주 발견되는 요소는 유선형이다. 철학의 범위에서 원을 포함한 선형은 특정한 기호이기 이전에, 원형질을 내포한 ‘실제에 한층 더 근접한 그 무엇’이다. 작가는 그것을 자유로워지고 싶은 희망과 버무려 의식하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다룬다. 이는 “화면 위 중첩 속에서 의미를 비껴가며 미지의 차원을 다시 열고 덧입힌다.”는 작가의 발언과 상통한다.

 

  1. 프랑스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저서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에서 위계적인 현실의 세계는 천상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에는 인간의 영역에선 알 수 없는 법칙이 있으며 생명의 순환원리 또한 우주론적 입장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정윤영의 작업에 대입할 때, <무제>(Untitled, 2020) 연작을 포함한 그의 근작들은 순연의 삶에 의탁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고 체념은 아니다. 그 보다는 불확실성과 무력감을 이겨내기 위한 긍정적 수용에 가깝다. 이때 예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균등하게 산포하는 유일한 도구이면서 존재성과 의미를 담아내는 거푸집이다. 한편으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향한 움직임이자 자신만의 가슴에 끝없이 쌓이는 희로애락을 담은 장렬한 예술적 장소이다.

다만 이 장소에도 삶과 그 삶에 관한 시선,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작품에 드리운 공간성과 더불어 공소의 미(空所-美)라는 원리가 배어있다. 전체적으론 자아와 존재의식, 자연의 일부로서의 삶에 관한 현실과 성찰이 투영되어 있고, 동시에 각각의 요소마다 고유의 시간성을 함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동시적 파편성을 띤다. 이는 공간, 즉 분할된 화면에서 드러나는 실제의 공간과 기호의 공간으로 구분되고, 실제의 공간과 기호의 공간은 모두 정윤영 자신으로 귀납되는 공통점이 있다.

귀납을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작업은 ‘불투명한 중첩’을 근간으로 한 근래 작업에서 더욱 강해진다. 기본적으로 삶의 의미복제라는 프레임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시공의 변주와 맞물린 심리성이 보다 간결하게 함축되어 있다. 특히 작품자체는 매우 체계적이나 즉흥적이고, 임시적 공간을 통한 공감각적 상황은 무언가에 대한 집요함이 녹아 있다. 이는 표현한다는 행위와 감각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미적 가치를 일깨우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아무튼 원고가 길어져 이쯤에서 정리하자면, 정윤영의 작품들은 존재와 절대적 근원에 관한 고민의 무대다. 삶의 여정에서 거둬들인 가시적인 것과 감추어진 것,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비동일성을 리듬 있게 연주하는 장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에게 예술이란 무정형의 정형이며, 시작은 사변적이나 결과는 미학적 차원에서 변형되고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한편 필자는 본 글을 작성하며 그의 모든 예술의 발원으로서 오용되는 신체, 아픔, 고독 등의 단어를 적시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 정윤영의 작품은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가치판단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의미 또한 유효했다.

 

 

혼종을 통한 생명의 지속에 대한 염원

김희영 (미술사, 국민대학교)

 

<겹의 언어>의 제목으로 열리는 정윤영의 이번 전시에서는 선명하고 밝은 색채와 부드러운 생동감을 전해주는 선적인 리듬이 각각의 독특한 강도와 밀도로 조화를 이룬 추상 작업이 소개된다. 꽃잎의 수맥을 연상시키는 섬세한 선묘, 율동적으로 흐르는 듯한 굵직한 선적 요소들, 때로는 세밀한 부분들을 대담하게 덮어버리는 붓 터치, 흐르는 물감 등으로 다양한 형태와 색채가 자유롭게 어우러진 화면은 작가의 부단한 조형 실험을 보여준다. 생기 가득한 역동적이고 추상적인 화면 위에 제시된 절개된 꽃의 단면, 잎의 줄기, 혹은 장기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형태들은 무한한 자유가 부여된 자율적인 화면의 리듬을 간헐적으로 정지시키는 듯하다. 이는 단지 구상성의 개입으로 인해 추상적인 화면 안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조형적인 타협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이러한 조용한 분절과 정지는 작가의 미학적 실험의 근거를 드러내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한 공간 안에 자유롭게 공존하는 화면은 사실상 다층적인 겹으로 구성되어 있다. 캔버스에 그려진 이미지 위에 몇 겹의 반투명한 비단에 그려진 이미지와 형상들이 겹치면서 구현된 화면은 각기 다르면서도 연결된 이미지들이 공존하는 장이다. 여러 겹의 이미지들은 물리적, 시간적 차이를 상정하면서 서로 겹쳐지는 과정 안에서 보완하기도 하고 덮기도 하고, 연결하면서도 맥을 끊기도 하는 가운데 생명의 지속성을 시사한다. 이는 화면 안에 고립된 미학적인 자율성을 구현하려는 노력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상이한 공간과 시간대에서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신체에 물리적, 심리적으로 인각되었음을 여러 겹으로 중첩된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래된 경험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나 소멸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재의 감성과 사고에 영향을 준다.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피할 수 없는 병마의 고통에 직면하여 생명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고독한 시간, 생명에 대한 갈망과 애착, 자연생태계에 편재하는 생명의 지속을 위한 다채롭고 지난한 노력에 대한 성찰 등이 정윤영의 작업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임을 되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신체에 인각된 고통의 기억, 그리고 존재의 연약함을 일상적으로 자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유한함은 작가에게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리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로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모순적인 사고와 감정들이 자아 안에 공존하고, 서로 충돌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타협해 가는 반복되지만 다른 내적인 싸움이 정윤영 작업에 내재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정윤영의 감성적, 성찰적인 서사는 <겹의 언어>에서 보여지는 작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얼핏 보기에 화려한 양란의 꽃잎, 선명한 색채, 봄바람이 부는 듯 생기에 찬 화면의 리듬 등은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것 같다. 오랫동안 불화의 기법으로 작업을 해 온 작가는 철선묘로 명확하게 대상을 그려내는 기량을 갖추고 있다. 역동성 안에 내재된 혼란 속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듯한 세밀한 선들은 그러한 선묘의 확장을 보여준다. 108배로 하루를 시작하는 작가는 반복되는 시간 안에서 자신과 세계와 항상 새롭게 대면한다. 그리고 또 다른 겹의 기억을 만들고 지나간 기억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가운데 내일을 기대하는 끊임없는 수행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

정윤영은 모순과 충돌로 가득한 현실을 살아가지만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과정 안에서 서로 다른 것들을 병치시킨다. 양란의 매혹적인 형태는 인간 장기의 부분을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형태에 중첩되어 창의적인 조형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이질성의 공존을 통해 구현된 조형성은 혼종을 통한 생명의 연장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염원한다. 윤회를 통한 끊임없는 존재의 지속, 죽음 다음에 이어질 다른 차원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가시적으로 갈등적인 요소들이 영속하지 않음을 알고, 없어질 것에 대한 욕망의 허무함을 자각하게 한다. 개인적인 기억의 과정을 보여주는 겹의 화면은 정윤영의 선별적인 선택을 통해 미학적으로 승화된 깨달음의 기쁨을 공유하고자 우리를 초대한다.